12화: 광주의 비극 (상) - 5.18 민주화 운동, 무력 진압의 잔혹성 🩸
12화: 광주의 비극 (상) - 5.18 민주화 운동, 무력 진압의 잔혹성 🩸
안녕하세요.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 그 열두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부마항쟁을 계기로 18년간의 유신 독재가 막을 내리는 과정을 함께했습니다. 독재자의 죽음 이후, 국민들은 드디어 민주주의의 봄이 올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었습니다. 우리는 이 짧은 시기를 **'서울의 봄'**이라고 부르죠. 하지만 이 희망은, 또 다른 군인들의 등장으로 너무나도 잔인하게 꺾이고 맙니다.
🤫 쿠데타 속의 쿠데타, 12.12 군사 반란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자, 합동수사본부장이라는 중책을 맡게 된 인물이 있었습니다. 바로 국군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이었죠. 그는 군대 내 사조직이었던 **'하나회'**를 중심으로 자신의 세력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979년 12월 12일 밤, 그는 대통령의 승인도 없이 군대를 동원해 자신의 상관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강제로 연행하는 하극상을 벌입니다.
이것은 명백한 군사 반란, 즉 12.12 사태였습니다. 군 지휘부를 무력으로 장악하고 군권을 손에 쥔 전두환과 그를 따르는 군인들, 우리는 이들을 **'신군부'**라고 부릅니다. 국민들이 민주주의의 봄을 노래하고 있을 때, 그들 뒤에서는 권력을 향한 검은 야욕이 소리 없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짓밟힌 희망,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
'서울의 봄' 동안 전국의 대학생들은 유신헌법 폐지와 민주화를 요구하며 대규모 시위를 벌였습니다. 1980년 5월 15일, 10만 명의 학생과 시민이 서울역에 모여 민주화를 외쳤죠. 하지만 신군부는 이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총칼로 짓밟을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1980년 5월 17일 자정, 신군부는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합니다. 국회를 폐쇄하고, 모든 정치 활동을 금지시켰으며, 김대중, 김영삼 등 민주화 운동을 이끌던 주요 정치인들을 모조리 체포했죠. 이것은 민주주의를 향한 국민의 열망을 완전히 꺾어버리려는 친위 쿠데타, 즉 5.17 쿠데타였습니다. 서울의 봄은 그렇게 허무하게 막을 내렸습니다.
🔥 1980년 5월 18일, 피로 물든 광주
신군부의 폭력에 가장 강력하게 저항한 곳은 바로 광주였습니다. 특히 호남 지역을 대표하는 정치인이었던 김대중의 체포 소식은 광주 시민과 학생들의 분노를 더욱 키웠죠. 5월 18일, 전남대학교 학생들은 계엄 해제를 외치며 거리로 나왔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대화가 아닌, 곤봉과 대검으로 무장한 최정예 공수부대였습니다.
공수부대원들의 진압 방식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잔혹했습니다. 그들은 학생, 청년, 심지어 길을 지나가던 평범한 시민들까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폭행했습니다. 곤봉으로 머리를 내리치고, 군홧발로 짓밟았으며, 대검으로 찌르기까지 했습니다. "학생 시위 한 번 했다고 사람이 저렇게까지 맞을 수 있나" 싶을 정도의 과잉 진압이 아니라, 처음부터 공포심을 극대화해 저항의 싹을 자르려는 명백한 **'학살'**이었습니다. 😭
🔒 고립된 도시, 거짓을 말하는 언론
신군부는 광주를 외부와 완벽하게 고립시켰습니다. 도시로 통하는 모든 도로와 통신이 차단되었죠. 광주는 거대한 감옥이 되었습니다. 더 끔찍했던 것은 언론의 왜곡 보도였습니다. 군부의 통제 아래, 모든 신문과 방송은 광주의 진실을 외면했습니다. 오히려 "광주에서 불순분자와 폭도들이 난동을 부리고 있다"는 식의 거짓 뉴스를 내보냈죠.
심지어 "북한 간첩이 사주한 폭동"이라는 악의적인 유언비어까지 퍼뜨렸습니다. 자신들의 잔인한 학살을 정당화하기 위해, 민주주의를 외친 광주 시민들을 '폭도'와 '빨갱이'로 몰아간 것입니다. 외부의 지원도, 진실을 알릴 방법도 없이, 광주는 그렇게 철저히 홀로 피 흘려야 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이 끔찍한 국가 폭력 앞에서 광주 시민들이 어떻게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들고, 서로 주먹밥을 나누며 저항했는지, 그 눈물겨운 연대와 항쟁의 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