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이야기

고려시대 1360년, 홍건적의 침입과 공민왕의 개혁

by 아리파파 2025. 8. 18.
반응형

 

고려시대 1360년, 홍건적의 침입과 공민왕의 개혁

수많은 시련을 이겨낸 대한민국의 역사적 사실 관계

원 간섭기의 끝, 그리고 새로운 위기

1350년대, 고려는 원나라의 오랜 간섭에서 벗어나 주권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했습니다. ✊ 공민왕은 반원 자주 정책을 내걸고 개혁을 추진하며 빼앗겼던 영토를 되찾고, 권문세족을 견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습니다. 👑 그러나 내부의 혼란이 채 수습되기도 전에, 고려는 또 다른 외세의 침략에 직면하게 됩니다. 바로 홍건적의 침입입니다. 😠

"혼란이 거듭되는 시대일수록, 백성의 삶은 더욱 고단해진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희망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1359년부터 시작된 홍건적의 침입은 고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 특히 1360년에는 2차 침입이 발생했는데, 홍건적은 개경(개성)을 함락하고 공민왕은 안동까지 피난을 가야 할 정도로 그들의 위세는 대단했습니다. 😨 수도가 함락되는 초유의 사태는 고려 백성들의 삶을 뿌리째 흔들었고, 국가의 위기감을 고조시켰습니다. 😥

고려시대 1360년, 홍건적의 침입과 공민왕의 개혁

공민왕의 개혁과 신돈의 숨겨진 역할

홍건적의 침입을 겪으며 공민왕은 국가의 기틀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의지를 더욱 굳혔습니다. 🧠 그는 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하기 위해 신돈을 등용했습니다. 🧐 신돈은 승려 신분이었지만, 공민왕의 총애를 받으며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을 설치하고 권문세족이 불법적으로 빼앗은 토지와 노비를 본래 주인에게 돌려주는 등 과감한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

⚠️ 역사적 주의사항
• 신돈의 개혁은 기득권층인 권문세족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습니다. 그의 개혁은 왕권 강화를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민생 안정이라는 목표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신돈은 권력욕에 눈이 멀었다는 누명 아래 숙청당하게 됩니다.

신돈의 개혁은 단기적으로 백성들의 삶을 개선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 특히 노비들을 해방시키고 토지를 돌려주는 정책은 백성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습니다. 👏 하지만 신돈의 개혁은 그가 죽은 후 곧바로 좌절되었고, 공민왕 역시 암살당하면서 고려의 개혁은 다시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

이성계와 신흥 사대부의 등장

홍건적과 왜구의 침략을 막아내는 과정에서 새로운 세력이 등장했습니다. 바로 이성계를 비롯한 신흥 무인 세력과 정도전 같은 신흥 사대부였습니다. ⚔️📝 이들은 무력으로 국경을 지키는 동시에, 성리학을 바탕으로 국가의 새로운 질서를 꿈꾸었습니다. 💡

이들은 홍건적의 침입을 막아내며 백성들의 신임을 얻었고, 쇠락한 고려 왕실을 대신할 새로운 역사의 주역으로 떠올랐습니다. ✨ 공민왕의 개혁이 좌절된 후, 이들은 스스로 개혁의 주체가 되어 새로운 왕조를 열게 되니, 바로 조선의 건국입니다. 🇰🇷

🚀 성장 결과
홍건적의 침입은 고려 왕조의 쇠퇴를 가속화했지만, 동시에 이성계와 신흥 사대부 같은 새로운 역량 있는 인재들이 전면에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는 훗날 조선을 건국하는 밑거름이 됩니다.

시간 순서별 역사적 사건 도표

시기 주요 사건 세부 내용
1352년 공민왕의 개혁 시작 원나라 간섭에서 벗어나 반원 자주 정책 추진
1359년 1차 홍건적 침입 홍건적이 압록강을 건너 고려에 침입
1360년 2차 홍건적 침입 홍건적이 개경을 함락하고 공민왕이 안동으로 피난
1365년 신돈의 개혁 실패 신돈이 추진한 개혁이 권문세족의 반발로 좌절됨
1388년 위화도 회군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며 실권을 장악

#홍건적의난 #공민왕개혁 #신흥사대부 #이성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