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이야기

11화: 군홧발 아래 민중 - 부마항쟁, 군대 진압의 시작 🔥

by 아리파파 2025. 8. 10.
반응형

11화: 군홧발 아래 민중 - 부마항쟁, 군대 진압의 시작 🔥

안녕하세요.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 그 열한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여성 노동자들이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벌였던 눈물겨운 투쟁을 함께했는데요. 오늘은 마침내, 18년간 이어졌던 철옹성 같던 유신 독재가 무너지게 된 결정적 사건, 바로 부마민주항쟁과 그 비극적인 결말에 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군홧발 아래 민중 - 부마항쟁, 군대 진압의 시작 🔥

🚨 무너질 것 같지 않던 독재, 균열의 시작

1979년, 박정희의 유신 독재는 영원할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끓어오르는 물은 언젠가 뚜껑을 밀어 올리는 법이죠. 당시 경제 상황은 악화되고 있었고, 국민들의 불만은 임계점을 향해 치닫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기름을 부은 사건이 터집니다. YH무역이라는 가발공장에서 부당한 폐업에 맞서던 여성 노동자들을 경찰이 폭력적으로 진압하고, 이 과정에서 한 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잃은 것이죠.

야당 지도자였던 김영삼 의원이 이 사건을 강력하게 비판하자, 박정희 정권은 국회의원직에서 그를 제명해버리는 초유의 사태를 벌입니다.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을 독재자의 마음대로 쫓아낸 이 사건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국민적 분노를 폭발시키는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 "유신 철폐! 독재 타도!" 부산과 마산의 함성

분노가 가장 먼저 터져 나온 곳은 김영삼 의원의 정치적 고향이었던 부산이었습니다.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학교 학생들이 "유신 철폐! 독재 타도!"를 외치며 거리로 나왔습니다. 학생들의 시위는 순식간에 시민들의 지지를 얻으며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부산 시내는 해방구와도 같이 뜨거운 함성으로 가득 찼습니다.

부산의 열기는 곧바로 옆 도시인 마산으로 번져나갔습니다. 10월 18일, 마산 시민들 역시 거리로 쏟아져 나와 독재에 항거했죠. 이렇게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을 우리는 부마민주항쟁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특정 계층이 아닌, 학생, 상인, 노동자 등 평범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독재 정권에 정면으로 맞선 위대한 저항이었습니다.

💥 시민을 향한 총구, 군대 진압의 시작

시민들의 거센 저항에 당황한 박정희 정권은 가장 끔찍한 카드를 꺼내 듭니다. 바로 군대를 투입하는 것이었죠. 부산과 마산 지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최정예 부대인 공수부대원들이 장갑차를 앞세우고 도시에 진주했습니다. 국민을 지켜야 할 군대의 총구가, 처음으로 국민을 향하게 된 비극적인 순간이었습니다.

군인들은 시위 참여자는 물론, 길 가던 무고한 시민들에게까지 무차별적인 폭력을 휘둘렀습니다. 도시는 순식간에 공포에 휩싸였죠. 이렇게 군대를 동원해 시민을 진압한 경험은, 안타깝게도 훗날 신군부가 광주에서 더 끔찍한 비극을 저지르는 '학습 효과'로 이어지게 됩니다. 😥

이 부마항쟁을 어떻게 처리할지를 두고, 정권 내부에서도 의견이 갈렸습니다. 차지철 경호실장은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도 죽였는데, 우리가 100만~200만 명 정도 죽이는 게 대수냐"며 강경 진압을 주장했고,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민심을 더 이상 거스르면 안 된다며 반대했죠. 이 갈등은 결국 파국으로 치닫습니다.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는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며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합니다. 18년간 이어졌던 유신 독재가 막을 내린 것입니다.

부마민주항쟁은 비록 군홧발 아래 잔인하게 진압되었지만, 결국 독재 권력의 심장을 멈추게 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독재자의 죽음이 곧바로 민주주의의 봄을 의미하지는 않았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또 다른 군인들이 어떻게 권력을 찬탈하고, 더 어두운 시대를 열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