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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14화: 민주화의 결정타 - 박종철, 이한열, 그리고 6월 항쟁 🕊️

by 아리파파 2025. 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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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민주화의 결정타 - 박종철, 이한열, 그리고 6월 항쟁 🕊️

안녕하세요.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 그 열네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고립된 광주에서 피어난 위대한 시민 연대를 함께했는데요. 오늘은 마침내, 그 모든 억압과 슬픔을 넘어 온 국민이 하나가 되어 군부 독재의 항복을 받아낸,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결정적 승리, 6월 민주 항쟁의 뜨거운 순간으로 여러분을 안내합니다.

민주화의 결정타 - 박종철, 이한열, 그리고 6월 항쟁 🕊️

💧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 -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1987년 1월, 스물두 살의 서울대생 박종철이 경찰에 연행된 지 하루 만에 차가운 시신으로 돌아왔습니다. 경찰은 "조사관이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누가 들어도 황당한 거짓말을 늘어놓았죠. 하지만 이 어설픈 거짓말은, 오히려 진실을 향한 거대한 불씨를 당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진실이 세상에 알려지기까지는, 자신의 직업과 목숨을 건 용기 있는 사람들의 숨은 노력이 있었습니다. 부검을 강행해 고문 흔적을 확인한 의사 오연상과 부검의 황적준, 시신 보존을 명령하며 끝까지 진실을 파헤치려 한 검사 최환, 그리고 이 사실을 세상에 알린 기자 윤상삼. 또한, 감옥 안에서 이 사건의 진실을 알게 된 이부영 기자가 교도관 한병용의 도움을 받아 쓴 쪽지를 외부로 전달하는 등, 수많은 양심들이 연대하여 독재 정권의 추악한 민낯을 벗겨냈습니다. ⛓️

🔥 불에 기름을 붓다, 4.13 호헌 조치

국민들의 분노가 들끓었지만, 전두환 대통령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1987년 4월 13일,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뽑게 해달라"는 모든 개헌 논의를 중단시키고, 기존의 간선제 헌법을 그대로 유지하겠다는 4.13 호헌 조치를 발표합니다. 이는 사실상 국민의 뜻을 무시하고 독재를 연장하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죠. 이 조치는 들끓는 민심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습니다.

📸 한 장의 사진, 그리고 터져 나온 함성 - 이한열 열사

마침내 1987년 6월 9일, 연세대학교에서 시위를 하던 학생 이한열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고 쓰러졌습니다. 피를 흘리며 다른 학생에게 기대어 있는 그의 사진은 다음 날 신문 1면에 실렸고, 이 한 장의 사진은 전 국민의 가슴을 울렸습니다. 😭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는 분노, 내 자식도 저렇게 될 수 있다는 공포가 사회 전체로 퍼져나갔습니다.

박종철의 죽음, 4.13 호헌 조치, 그리고 이한열의 희생은 마침내 모든 국민을 거리로 불러냈습니다. 1987년 6월 10일, 학생들뿐만 아니라 넥타이를 맨 회사원들, 시장 상인들, 평범한 주부들까지 모두 거리로 쏟아져 나와 "호헌 철폐! 독재 타도!"를 외쳤습니다. 이것이 바로 6월 민주 항쟁의 시작이었습니다.

전국 모든 도시의 광장과 거리는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시민들의 함성으로 가득 찼습니다. 시위대를 향해 최루탄이 발사되면, 주변 빌딩의 직장인들은 손수건과 휴지를 던져주며 응원했죠. 군부 독재는 더 이상 국민의 거대한 저항을 이겨낼 수 없었습니다. 결국 6월 29일, 신군부는 국민의 요구에 굴복하여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약속하는 **'6.29 선언'**을 발표합니다. 국민이, 마침내 승리한 것입니다! 👏

이 6월 민주 항쟁을 통해 우리는 마침내 대통령을 우리 손으로 직접 뽑을 수 있는 권리를 되찾았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이 위대한 승리 이후,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어떻게 발전해왔는지, 그리고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는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하며 대장정의 마지막을 준비하겠습니다.